보는 것과 보이기 위한 것 ─ 윤준성 (숭실대학교 미디어학부 교수)
우리가 어떤 대상을 아름답다고 할 때, 그 대상이 원래 아름답기 때문에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인지, 혹은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기 때문에 그 대상이 아름다운 것인지에 관해 논의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17세기와 18세기를 거치면서 진리와 연관된 전자의 시각에서 후자의 시각으로 전환되는 현상은 다분히 우리에게 보이기 위한 것과 우리가 보는 것의 상황으로 확장시켜 살펴볼 필요가 있다. 또한 칸트 이후에 지속되어온, 아름다움의 인자(attribution)가 그 대상과 직접 연관되어 있고 개인적이며 직접적인 반응이라는 인식은, 아름다움이 동시대 인간들의 가치와 태도에 대해 독립적이지 않으며 한 인간의 인지는 믿음과 도덕적 정의(justice)에 기초한다는 인식과 변별되어 주장되었다.
특히 인간의 몸이 재현된 예술작품을 거론할 때 빈번하게 노출되는 자연과 인간의 동일시가 여전히 유효한가하는 문제는, 거대한 도시의 다양한 에너지를 선택하여 흡수하는 도시인의 능동적인 상황과 자연의 웅대한 에너지를 선택 없이 좋은 것으로 받아들여야 하는 수동적인 정황 속에서 재고될 필요가 있다. 따라서 인간의 몸을 소재로, 혹은 주제로 다루는 작가들의 관념이 지극히 고전적인지, 혹은 현대적인지를 가늠하는 척도는, 인간의 몸에 대한 지극한 경배와 지극한 운용으로 변별될 수 있을 것이다.
적절한 비례로 얻어지는 아름다움에 관한 논증이 그 유효성을 상실한 정황에는 사진이 있었다. 처음으로 인물사진을 본 당시 화가 중에는, 사진에 나타난 인물이 적절한 비례로 얼굴이 표현되지 않았기에 초상을 위한 매체로 적합하지 않다는 억측을 내놓기도 했다.
주어진 아름다움의 틀에 맞추어 조절된 인물화와 있는 그대로의 인물사진에서 벌어지는 당시의 정황은 웹캠 앞에 밝은 화면을 띄워놓고 얼굴을 로앵글로 들이미는 사용자, 그리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과 그리 다르지 않다. 그리고 적어도 인간의 묘사에서 서양의 고전적인 방법론은 영원한 아름다움을 추구했으나, 일종의 편견에 입각한 우생학(eugenic)적인 접근이었다.
문제는 인간의 얼굴을 재현하는 것은 일종의 보이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고, 우리가 보는 것은 그와 차이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인간의 벗은 몸을 보는 것은 시선의 무게를 증가시키려는, 보여주기 위한 의도와 복잡하게 교차되어 있다. 일단 아름다운 신체, 신이 창조한 완벽한 몸으로서의 예술적 재현은 이미 오래된 전통에서 이제는 사라진 빛조차 찾을 수 없다. 그리고 벗은 몸을 대상으로 하는 사진은 일련의 전환을 겪고 보여주기 위한 몸에서 작가가 보는 몸의 면모를 갖추어왔다.
이미 1900년을 전후하여 많은 사진가가 인간의 몸에 접근하였다. 인간의 동작을 탐구한 초기 사진들을 살펴보면, 예컨대 이드위어드 마이브리지(Eadweard Muybridge, 1830~1904)의 연속사진을 보면 탐구라기보다는 벌거벗은 여성이나 남성이 움직이는 것에 대한 흥미 위주임을 알 수 있다. 그의 작업은 처음 시도한 말이나 개가 달리는 모습, 마차가 움직이는 모습의 탐구에서 움직이는 인간의 모습(The Human Figure in Motion)으로 진행되어 벌거벗은 여성과 남성의 움직이는 모습을 탐구라는 이름 아래 흥미롭게 향유시키고 있다.
한편 일련의 사진가들은 벗은 신체를 통하여 자연적이고 원초적이라는 아름다움의 관념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러한 접근은 개인적인(혹은 주체적인) 접근이라는 면에서 특이하다. 이러한 경향에서 남성의 벗은 몸은 두드러지는데 시각적 재현에서 여성의 몸을 재현하는 것이 일반적이던 것이 남성의 몸을 특이하게 상정한다.
프레드릭 홀랜드 데이(Frederick Holland Day, 1864~1933)는 자신을 예수로 분한 상황을 연출하여 벗은 몸을 사진에 담거나, 아프리카인의 드러난 몸을 다룬 사진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사진들은 동성애자인 홀랜드 데이의 시각을 내포하고 있었고, 일반적인 경향이 아니라 일부의 시각으로 간주되었으며, 전통적인 규범에서 일탈한 재현을 드러낸다.
또한 조지 플랫 라인스(George Platt Lynes, 1907~1955)는 로버트 매플소프(Robert Mapplethorpe)의 선조(先祖)로 지목을 받으면서 동성애 문제를 환기시키고 있다. 그의 사진 중 남성 누드 작업은 인디애나 대학(Indiana University) 내의 킨제이 연구소(The Kinsey Institute)의 사진 자료실에 보관되어 있었다. 그가 동성연애자 중심의 남성 누드를 추구한 것은, 1928년 장 꼭또(Jean Cocteau)가 앙드레 브르통(Andre Breton)에 의해 동성애에 관한 단죄로 고립되는 사건에 기인한다. 이때부터 라인스는 동성애자로서의 정체성을 사진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모델의 자세도 그리스 조각상의 자세를 본뜨거나, 변형하여 현대에서 용인되지 않는 고대의 표현을 문제로 제시하며, 자신의 정체성과 사회의 마찰에서 일어나는 내적 혼란을 발산시킨다.
편견과 고정관념에 대한 반발로서의 알몸
초기의 사진가들이 인간의 나체를 다룬 경우는 다양하다. 물론 현재와 마찬가지로 흥미 위주의 나체 사진이 더 많은 대중을 사로잡았던 것이 사실이다. 현재에도 지속되는 예술과 외설에 관한 문제도 이러한 상황을 대변해줄 수 있다. 그러나 작가들이 꾸준하게 탐구해 온 나체의 문제는 조금 다르다. 인간의 나체를 통해서 무엇인가를 이야기한다는 것은, 인간의 몸을 마치 물이나 바람처럼 물리적인 형체가 없는 상태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옷이나 다양한 치장으로 인간이 판단되고 수용되는 것에 대한 일종의 반발은 알몸으로 선 인간의 원초적인 평등으로 대두되고, 이러한 경향이 한동안 지속되었다. 삭발한 여성의 등장이나 체모를 제거한 나체의 제시는 이 경향의 극단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따라서 많은 행위예술가가 알몸으로 행하는 작업은 한 인물에 대한 다원화된 편견과 고정관념을 제거하기 위함이었다. 마치 흑백사진이 컬러사진보다 주제를 더욱 잘 표현할 수 있다는 관념도 인간의 알몸에 관한 생각과 일맥상통한다.
인간의 벗은 몸에 대한 새롭고 다원화된 접근은 현대 작가들에 의해 다양하게 시도되며 재고되고 있다. 일련의 작가들은 알몸에 대한 순수한 인식을 의심하고, 알몸이 궁극적으로 성행위와 연관된 연상을 일으킨다는 것에 동감한다. 이른바 순수한 아름다움으로서의 육체는 성의 무게 앞에서 순식간에 사라지기 쉽다. 따라서 앞서 언급한 신이 창조한 완벽한 몸으로서의 예술적 재현은 결국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하나의 방법론이다. 관객이 보는 것, 혹은 보아야 할 것은 결국 알몸이 아니다. 알몸은 보는 것을 위해 사용된 단지 보여주기의 방법일 뿐이다. 그리고 사진에 대한 재고는 인간의 나체를 새롭게 고찰하는 데서 이루어진다.
토마스 루프(Thomas Ruff, 1958~ )는 웹에서 떠다니는 무료 포르노 사이트에서 얻은 사진들을 사용했다. 웹에서 손쉽게 다운로드받은 이미지들을 흐림과 가색을 통해 〈Nudes〉라는 시리즈로 발표했다. 그는 포르노 이미지의 가치를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 이미지에 대한 순간적인 응시에 집중한다. 즉 이들 이미지가 보이면 예술은 찾아볼 수 없고, 단지 인간의 몸에 대한 인지라는 그 원초적인 권위만이 드러난다. 지나가는 여성의 다리나 엉덩이를 흘깃거리는 중년신사처럼, 러프가 만들어내는 이미지는 그 요체가 성에 집중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Nudes〉를 통해 우리가 순간적으로 인식하는 것은 성행위와 연관된 인간의 몸이며, 인간이 가진 원초적인 것에 대한 권위의 증거이다. 특히 이러한 이미지들은 작가가 존재하지 않는 상태이고 작자 미상으로 세상을 떠돈다. 이 작업에서 사진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사진이 몸을 대신하는 무형의 공기처럼 기능한다.
사진은 발명된 이후 모든 종류의 흥미를 위해 사용되어 왔고, 오늘날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사진은 더 이상 신빙성을 확보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작가의 개입에 의한 현실의 변환은 작가의 전통적인 역할로 사진에 전가되었으며, 이제 사진은 단지 조작되고 연출된 현실로서의 위상만을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보이기 위한 장치를 보는 것을 위해 사용하는 인간은 진지할 수밖에 없다.
이제는 사진에 나타난 재현이 너무 현실 같으면, 우리는 도리어 그 사진을 의심한다. 인간의 알몸이 나타나는 사진에 관한 고려를 통해 사진이 그 표상만을 지향하지 않는다는 것이 드러나지만, 어설픈 보여주기의 사용은 도리어 보는 것을 차단하는 한계를 갖기도 한다.
바네사 비크로프트(Vanessa Beecroft, 1969~ )의 작업은 이러한 보여주기의 문제가 갖는 한계를 확연히 열어서, 그 자체를 논의의 대상으로 드러낸다. 국내에서는 사진으로 전시되었지만, 그녀의 작업은 이벤트이며 퍼포먼스이다. 살아있는 인간을 주재료로 사용한 비크로프트의 작업은 알몸, 옷을 부분적으로 입은 상태, 혹은 하이힐이나 기본적인 속옷만 일률적으로 착용한 여성 모델 수십 명을 전시 공간에 배치하여 일정시간을 경과시키는 것이다.
초기에는 자발적인 참여자를 사용했으나, 최근에는 모델을 고용하여, 움직이지 말 것, 말하지 말 것, 관객들에 반응하지 말 것등을 명령한다. 이러한 규칙이 모델들을 하나의 그룹으로 만들어 이미지로 산출한다. 즉 알몸의 여성들은 각각으로 인지되지 않고 모두 동일하게 인지되는 효과가 비크로프트의 작업에서 드러난다. 이러한 접근은 알몸보다 더 통합적이고 자연스러운 것이 어디에 있느냐라는 전통적인 문제를 다시금 환기시키는 동시에, 그것을 흥미롭게 바라보는 관객들의 시각도 지극히 일률적이며 원초적이라는 것을 지적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그녀의 작업은 고전적인 아름다움이 생성하는 수치심과 연관되어 있다. 이것은 남성이 벌거벗은 남성 조각상에 달린 성기를 보면서 느끼는 이상한 수치심이나, 혹은 어린 자녀와 함께 그것을 볼 때 느끼는 당혹스러움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관객들은 그들을 바라보고 지쳐가는 모델들과 함께 지쳐가며, 과도한 보여주기는 도리어 보는 것에 관한 심각한 고려를 산출한다. 비크로프트의 실험성은 이러한 보여주기의 문제에 관한 적극적인 직면일 것이다. 보고 싶은가, 그러면 보이기 위해 만든 이것을 실컷 보라. 보면 볼수록 다른 방법으로 접근되는 기묘한 구성은 바로 보이기 위한 것들의 한계를 드러낸다.
반면 비크로프트의 작업이 사진으로 재현될 경우, 작업의 전반적인 구조에 치명적일 수 있다. 전통적인 예술매체 중의 하나인 회화에서 물감이라는 재료로 이루어진 대상의 재현과 사진에서 은화합물로 이루어진 대상의 재현은, 몸 자체를 재료로 사용하는 비크로프트의 접근과 큰 차이를 보인다. 사진으로 기록된 비크로프트의 작업은 보이기 위한 것의 한계를 드러내기보다는, 혹은 보는 것의 문제에 바로 접근하기보다는, 다시 그 한계로 함몰되는 상황을 재연한다. 그러나 현대사진에서 인간의 몸, 특히 알몸에 관한 문제는 매체의 폭넓은 유통 구조에서 이러한 한계를 벗어나고 있다. 이미 우리는 실컷 보았고, 사진에서 얼음처럼 굳어진 수많은 모델들을, 한정된 인지 상황에서, 다시금 보이는 것의 한계로 경험하면서 그 실재를 목말라한다.
만일 모든 예술이 이러한 상황이어야 한다는 도그마가 존재한다면, 그래도 좋다. 그러나 실제로 모든 예술은 이러한 복잡한 관계의 정리가 아니라, 지속적인 실험 속에서 더 복잡한 관계를 제시하든지, 혹은 그 관계를 벗어나려는 시도로 가득하다.
전통적인 아름다움에 관한 육체의 개념은 신이 주신 완전함을 경배하면서, 자연의 일부인 근원적인 모습을 탐구함으로써 발달해 왔으며, 그 탐구의 방향은 공기처럼 보이지 않는 무형의 매체로 추구되었다. 사진은 이 과정에 경제적인 활동의 추구와 함께 자연미의 탐구에 집중되었으며, 현대에 이르러서야 이러한 경향에서 서서히 일탈하기 시작하여, 알몸의 매체적 위상을 수렴하고 있다. 그러나 알몸에 실린 그 무게 있는 원초적 시각은 방법론적으로 일탈의 가능성을 보이지만 그리 용이한 것이 아니다. 보이는 것에 집중되어온 사진의 방법론은, 보는 것의 문제에 대한 논의를 거듭해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원초적인 시각에 사로잡힌 상황을 드러내곤 한다.
이러한 상황은 패러시오스(Parrahsios)와 제우시스(Zeuxis)의 내기에서 패러시오스가 승리하는 방법, 자, 이제 그 베일을 벗겨보시죠.에서 드러난 것과 유사하다. 다만, 현대의 관객은 제우시스처럼 쉽게 속지 않는다. 따라서 현대의 작가들이 인간의 알몸이 드러나는 소재를 통하여 실험하는 문제는, 보는 것에 대한 직접적인 접근이고, 보이는 것에 집중되었던 재현의 역사를 개진하는 과정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바라보는 관객도 다원화된 상황에서 작품에 접근한다.
우리가 보는 사진에서 벗은 몸은 보여주기 위해 상정된 하나의 눈알무늬(ocelli)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날갯짓을 하는 커다란 나방의 날개에 그려진 동심원 문양은 포식자를 미혹해 나방의 머리를 먹지 못하게 만드는 것 같지만, 실제로 포식자의 뱃속에서 그 문양을 가진 나방들이 더 적게 발견되지는 않는다.
보는 이들이 미혹되는 것이 벗은 몸인 것 같지만, 그로 인해 더 많은 것을 볼 수도 있으며, 보이는 것만을 포식하였음에도 더 큰 포만감을 경험하거나, 보는 것을 포식하지 못함으로 인해 여전히 굶주림을 호소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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