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시아문(如是我聞)/경전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

大空 2007. 6. 26. 21:38
해인사 팔만대장경

해인사를 일러 법보종찰이라 하는 것은 고려대장경 곧 팔만대장경 이라고도 불리는 무상법보(無上法寶)를 모시고 있는 까닭이다. 고려대장경을 흔히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까닭은 대장경의 장경판수가 팔만여장에 이르는 데에서 비롯되기도 했을 터이지만, 한편으로는 불교에서 아주 많은 것을 가리킬 때 팔만사천이라는 숫자를 쓰는 용례대로 가없이 많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팔만사천 법문이라고 하는 데에서 비롯되었음직하다. 
해인사 장경판전 내부

팔만대장경은 고려시대에 두 차례에 걸쳐 국가사업으로 간행되었다. 먼저 간행된 구판(舊板)대장경은, 1011년에 부처님의 위신력으로 거란의 침공을 물리치려는 발원에서 시작하여 1087년까지 무려 77년에 걸쳐 이루어진 것으로, 그 무렵으로서는 중국의 장경에 견주어 내용이 가장 완벽한 것이었다. 그러나 팔공산 부인사(符仁寺)에 봉안된 이 구판 대장경은 고종 19년인 1232년에 몽고군의 병화로 그만 불타 버리고 말았다. 그로부터 오년 뒤인 1236년에 다시 본격적으로 팔만대장경 간행 불사를 추진하여 1251년에 그 완성을 보게 되니, 십육년에 걸친 이 큰 불사의 결실이 바로 지금 해인사에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다.



 완성된 팔만대장경은 처음에는 강화도에 모셨으나, 왜구의 노략질이 심해져서 서울의 지천사(支天寺)로 옮겼다가 그 뒤 조선시대 태조 임금 때인 1398년에 해인사로 다시 옮겨모신 것이다.

팔만대장경의 경판에 쓰인 나무는 섬 지방에서 벌목해 온 자작나무에 후
해인사 장경판전 외부
박나무로서, 그것을 통째로 바닷물에 삼년 동안 담그었다가 꺼내어 조각을 내고, 다시 소금물에 삶았다가 그늘에 말린 것을 썼다. 그것을 다시 대패로 곱게 다듬은 다음에야 경문을 새겼는데, 먼저 붓으로 경문을 쓰고 나서 그 글자들을 다시 하나하나 판각하는 순서를 거쳤다. 팔만대장경을 만드는 데에 들인 정성과, 한치의 어긋남과 틀림도 허용하지 않은 그 엄정한 자세는 요즈음 사람들로서는 도저히 따라갈 수도 없거니와 상상하기조차 힘든 것이었다. 곧, 글자를 한 자씩 쓸 때마다 절을 하였다고 하니, 그렇듯이 끝간 데 없는 정성을 들임으로써, 설흔 명 남짓한 사람들의 솜씨로 쓴 무려 52,382,960개에 이르는 구양순체의 그 글자들이 한결같이 꼴이 아름다운 것은 말할 것도 없으려니와 마치 한 사람이 쓴 듯이 일정하며, 한 글자도 잘못 쓰거나 빠뜨린 자가 없이 완벽한 장경을 이루고 있다.  

경판의 마무리까지도 세심하게 손을 본 이 팔만대장경은 그 체제와 교정이 정확하고 조각이 섬세하고 정교하여서도 그렇지만, 이미 없어진 거란장경의 일부를 비롯하여 중국 대장경에는 없는 경전들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도, 중국 최고의 대장경이라고 일컬어지는 만력판(萬歷板)이나 또 후세에 만들어진 어떤 대장경도 따라올 수 없는 독보적인 빼어남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하여 팔만대장경은 특히 근대에 만들어진 일본의 신수대장경을 비롯한 현대의 불교대장경들의 으뜸가는 보기가 되기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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