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름다운 시

생명의 서(書)/청마 유치환

大空 2007. 6. 27. 13:40

생명의 서(書)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여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死滅)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沙)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이 시는 <일월(日月)>과 함께 생명파 시인으로서의 유치환의 시정신을 극명히 보여 주는 작품이다. 전 3연으로 이루어진 이 작품은 본연(本然)의 생명을 추구하여, ‘출발’ → ‘수련’ → ‘성취’의 과정을 통하여 강인한 남성적 어조로 극한적 의지를 표현함으로써 청마시의 전형을 제시한다.

1연은 본질적인 삶을 추구하다 발견한 지식의 한계와, 감정을 절제하지 못하는 자신의 삶에 절망하여 ‘아라비아 사막’으로 상징된 구원의 세계로 떠나가자고 스스로 다짐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그 곳은 작열하는 태양과 고뇌와 방황의 알라신만이 계신 ‘영겁의 허적’으로 혹독한 고행과 절대적 고독의 현장일 뿐이다.

2연은 모든 것이 사멸하고 뜨거운 태양만이 내리쬐는 열사의 땅에서, 시적 화자가 구도자의 기도하는 자세로 오랜 고행과 수련의 고통을 겪은 다음, 마침내 진실된 자아, 생명의 참모습을 발견하는 내용이다. 3연은 참된 자아가 허위와 위선에 물들지 않은 원시 그대로의 순수한 생명체의 삶을 되찾지 못할 때는, 차라리 그 곳에서 미련없이 목숨을 버리겠다고 절규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해 시적 화자가 떠나가는 아라비아 사막은 ‘허적’이 주는 하강력(下降力), 곧 온통 허무뿐인 죽음의 세계이며, 역설적으로 ‘열사’가 갖는 상승력(上昇力), 곧 뜨거운 생명이 샘솟는 세계이기도 하다.

고통의 극한, 극도의 고독에서만 진정한 자기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는 유치환의 논리는 범을 잡으려면 범의 굴을 찾아야 한다는 이치와 동일하다. 이렇게 죽음 속에서 생명을 찾아내는 유치환의 생명 탐구 방법은 청마 특유의 허무 의식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 이것은 도리어 허무를 극복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선택된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노장 철학(老莊哲學)의 허무 사상과도 그 맥락이 닿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는 비교적 많은 관념어를 사용하고 있고, 각 연의 1․2행이 모두 진술(陳述)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적 구체성을 잃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동아일보󰡕�, 1938.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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