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름다운 시

꽃밭의 독백(獨白) - 사소(娑蘇) 단장(斷章) /서정주

大空 2007. 6. 27. 13:24
꽃밭의 독백(獨白) - 사소(娑蘇) 단장(斷章)

 
노래가 낫기는 그 중 나아도
구름까지 갔다간 되돌아오고,
네 발굽을 쳐 달려간 말은
바닷가에 가 멎어 버렸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鷹]로 잡은 산새들에도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
꽃아, 아침마다 개벽(開闢)하는 꽃아.
네가 좋기는 제일 좋아도,
물낯 바닥에 얼굴이나 비취는
헤엄도 모르는 아이와 같이
나는 네 닫힌 문에 기대 섰을 뿐이다.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벼락과 해일(海溢)만이 길일지라도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

 

이 시는 '사소 단장'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작품입니다. 여기에서 사소는 신라 시조 박혁거세의 어머니로서, 처녀로 잉태하여 산으로 신선 수행을 간 일이 있는데, 이 글은 길 떠나기 전에 그의 집 꽃밭에서의 독백을 시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이 작품에서 꽃과 구름의 이미지는 중요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특히 꽃은 지상에 피어 있는 생명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원에 이르는 길의 표상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지닙니다. 꽃은 지상으로부터 영원에 이르는 통로이자, 그 영원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죠.

그것은 먼저 대지적, 물질적 삶에 대한 회의와 부정으로부터 시작됩니다. '활로 잡은 산돼지, 매로 잡은 산새들에도 / 이제는 벌써 입맛을 잃었다.'라는 구절 속에서 동물적 상상력 내지는 대지적 상상력이 퇴화되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침마다 개벽하는 꽃아'와 같이 정신적인 생명에 대한 갈망과 동경이 드러나 있는 것이죠. 여기에서 '개벽하는 꽃'이란 소멸과 생성, 죽음과 부활, 죽음과 탄생이 되풀이됨으로써 거듭 태어나는 영원한 생명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따라서, '문 열어라 꽃아. 문 열어라 꽃아.'라는 절규 속에는 영원한 절대 세계에 대한 뜨거운 열망이 담겨 있는 것이죠. 그것은 대지적 존재에서 영원한 삶으로 상승하고자 하는 바람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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