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아름다운 시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李相和)

大空 2007. 6. 18. 19:06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이상화(李相和)

 

  지금은 남의 땅 -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나는 온몸에 햇살을 받고,

  푸른 하늘 푸른 들이 맞붙은 곳으로,

  가르마 같은 논길을 따라 꿈 속을 가듯 걸어만 간다.

 

  입술을 다문 하늘아, 들아,

  내 맘에는 나 혼자 온 것 같지를 않구나!

  네가 끌었느냐, 누가 부르더냐. 답답워라. 말을 해 다오.

 

  바람은 내 귀에 속삭이며,

  한 자국도 섰지 마라, 옷자락을 흔들고.

  종다리는 울타리 너머 아씨같이 구름뒤에서 반갑다 웃네.

 

  고맙게 잘 자란 보리밭아,

  간밤 자정이 넘어 내리던 고운 비로

  너는 삼단 같은 머리를 감았구나. 내 머리조차 가뿐하다.

 

  혼자라도 가쁘게나 가자.

  마른 논을 안고 도는 착한 도랑이

  젖먹이 달래는 노래를 하고, 제 혼자 어깨 춤만 추고 가네.

 

  나비, 제비야, 깝치지 마라.

  맨드라미, 들마꽃에도 인사를 해야지.

  아주까리기름을 바른 이가 지심 매던 그 들이라 다 보고 싶다.

 

  내 손에 호미를 쥐어 다오.

  살진 젖가슴과 같은 부드러운 이 흙을

  발목이 시도록 밟아도 보고, 좋은 땀조차 흘리고 싶다.

 

  강가에 나온 아이와 같이,

  짬도 모르고 끝도 없이 닫는 내 혼아,

  무엇을 찾느냐, 어디로 가느냐, 웃어웁다, 답을 하려무나.

 

  나는 온몸에 풋내를 띠고,

  푸른 웃음, 푸른 설움이 어우러진 사이로,

  다리를 절며 하루를 걷는다. 아마도 봄 신령이 지폈나 보다.

  그러나 지금은 -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개벽(1926)

 

이해와 감상

1926년 <개벽>에 일제의 검열을 피해 발표된 이 시는 이상화가 카프에 가담한 후에 발표한 것으로, <백조> 동인 시절의 '마돈나 나의 침실로'에서 보인 관능적. 퇴폐적 낭만성을 극복하고 망국의 현실을 직시하여 쓴 저항성이 엿보이는 작품이다. 이 시는 의미상 대략 네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1연에서 3연까지, 둘째는 4연에서 6연까지, 셋째는 7연에서 9연까지, 넷째는 10연까지로 나누어진다. 첫째 단락은 주권 상실의 땅, 동토의 조선에 찾아오는 봄의 정경이 몽상저긴 분위기로 묘사되어 있다. 둘째 단락에서는 봄을 찾아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이 제기된다. 현실은 어둡고 막혀 있지만, 희망을 갖고 앞날을 향해 혼자서라도 나아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셋째 단락에서는 둘째 단락에서 보인 부활 의지 또는 선구자 의식이 보다 큰 의미에서의 대지 사상, 또는 노동 의지로 육화되어 나타난다. 마지막 단락에는 다시 빼앗긴 들을 위태롭게 살아가는 위기 의식과 함께 민족혼이 쉽게 멸하지 않으리라는 것에 대한 확신이 드러난다. 이 작품은 주권과 국토를 빼앗긴 참담한 식민지 현실하에서, 흔들리지 않는 대지와 변하지 않는 대자연의 섭리를 통해서 민족혼의 살아 있음과 그 불멸함을 탁월하게 형상화한 작품으로 이해된다. 나라를 잃은 민족의 암담한 절망과 일제의 강압 아래에서 비탄과 허무 사이를 방황하며 어쩔 수 없이 회의적. 자조적. 영탄적인 허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그러나 봄이 되면 민족혼이 담긴 조국의 대자연이 우리를 일깨워 줄 것이라는 신념과 국토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 당대 식민지 현실을 '남의 땅 빼앗긴 들'이라고 직접적 저항적으로 부르짖으면서도 대지 사상과 노동 사상의 아름다운 비유로 육화해서 노래한 것은 이 시를 암흑기 최대 작품의 하나로 평가하기에 손색이 없게 만들어 준다. 이 시는 3음보, 4음보를 기저로 하고 있다. 3행씩 묶어 하나의 단락으로 나누어 볼 때 각 단락 내에서 시행이 점점 길어짐으로써 완급률을 형성, 서정적 주인공의 발걸음과 보조를 같이 한다. '가르마' '삼단 같은 머리' '들마꽃' '아주까리 기름' 등 향토적 정감을 주는 시어를 사용하여 민족과 국토에 대한 애정을 비유적 심상으로 노래했다. 함축적 언어, 향토적 시어, 격렬한 호흡, 돈호법 등이 나타난다. -구인환 <고교생이 알아야 할 시> 중에서